먹는 일이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회피적 제한적 음식섭취장애의 약자인 ARFID는 체중과도, 체형과도, 누군가를 곤란하게 하려는 마음과도 무관한 극도로 좁은 식생활을 가리킵니다. 이름은 최근에 생겼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십 년 동안 ‘까다롭게 구는 것도 언젠가는 지겨워질 거야’라는 말을 들어온 끝에 이 이름에서 자기 자신을 알아보는 성인이 많습니다.
진단이 아우르는 것
ARFID는 체중이나 체형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되지 않으면서 실제적인 여파를 낳는 음식 회피 또는 제한을 가리킵니다. 이 여파는 여러 얼굴을 할 수 있습니다. 체중 감소, 아동이라면 성장 곡선에서의 이탈, 영양 결핍, 보충제나 의학적 영양 공급에 대한 의존, 또는 뚜렷한 사회적, 심리적 지장입니다.
이 마지막 항목은 자주 간과됩니다. 체중이 완전히 평범한 사람도 먹는 일이 회피를 중심으로 삶을 조직한다면 이 그림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초대를 거절하고, 자기 음식을 챙기지 않고는 결코 여행을 떠나지 않고, 팀 회식이 의무인 직장을 그만두는 식입니다. ARFID는 체중계로 읽히지 않습니다.
음식을 구할 수 없어서, 문화적이거나 종교적인 관행 때문에, 또는 그것을 온전히 설명하는 질병 때문에 제한이 설명될 때에는 이 진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림이 신경성 식욕부진증이나 신경성 폭식증에 속할 때도 내리지 않습니다. 전문가가 평가하는 전체적인 배치이지, 체크할 항목이 아닙니다.
서로 아주 다른 세 가지 기전
이 명칭은 서로 거의 아무 관련이 없는 기전들을 한데 묶습니다. 그리고 이 구분은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를 전부 바꿔 놓습니다.
- 감각적 혐오. 음식의 질감, 냄새, 색, 온도, 겉모습이 즉각적인 거부 반응을, 때로는 헛구역질을 일으킵니다. 덩어리진 것, 질긴 섬유가 남는 것, 물컹한 것, 섞여 있는 것이 흔한 유형입니다. 정확히 같은 상표, 같은 조리, 같은 그릇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입맛이 까다로워서가 아니라 입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관심의 부재. 느껴지는 배고픔이 없고, 기대되는 즐거움이 없으며, 세 입이면 포만이 옵니다. 먹는 일은 잊고 지나가는 귀찮은 일이 되고, 제한하려는 의도 없이도 끼니 사이가 벌어집니다.
- 사고에 대한 공포. 질식, 구토, 소화기 통증, 알레르기 반응을 겪은 뒤에는 삼키는 행위 자체가 위험해집니다. 그러면 제한은 위험하다고 판단된 질감들을 중심으로 좁혀집니다.
이 기전들은 한 사람 안에서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각각의 비중은 살아가는 동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이 우세한지를 아는 일이 제안되는 작업 전체의 방향을 정합니다.
ARFID는 신경성 식욕부진증이 아닙니다
가장 흔하고 가장 무거운 결과를 낳는 혼동입니다. 둘 다 심한 제한과 체중 감소를 낳을 수 있지만, 마음속 내용은 정반대입니다. 신경성 식욕부진증에서는 몸이 쟁점입니다. 체중, 체형, 살찌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ARFID에서는 몸이 전혀 쟁점이 아닙니다. 막혀 있는 것은 먹는 행위입니다. 당사자 중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더 많이, 더 다양하게 먹고 싶어 하며, 자신의 좁은 식생활을 목표가 아니라 감내하는 제약으로 겪습니다.
실질적인 결과가 중요합니다. 신경성 식욕부진증을 위해 고안된, 신체 이미지와 체중 증가에 대한 두려움을 중심에 둔 지원은 과녁을 빗나가며 오래도록 의욕을 꺾을 수 있습니다. 이 혼동은 남성과 성인에서 발견이 늦어지는 이유의 일부도 설명합니다. 이 두 집단에서는 섭식장애를 잘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투정, 양육, 그리고 저절로 낫는다는 신화
분명하게 무너뜨려야 할 통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이것은 밥상에서 부리는 까다로움이 아닙니다. 선호는 협상할 수 있지만 이런 종류의 혐오는 협상되지 않습니다. 의지가 닿지 않는 신체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시키기, 흥정하기, 요리에 재료를 숨기기, 몰래 맛보게 하기는 먹을 수 있는 범위를 넓히지 못합니다. 이런 전략들은 회피를 악화시키고 신뢰를 망가뜨립니다. 식사 자체에 대한 신뢰까지 포함해서입니다.
이것은 양육의 잘못이 아닙니다. 먹는 어려움은 자폐인에게 흔하며, ADHD나 불안장애, 감각 과민과 함께 나타나는 일도 많습니다. 반면 유아기의 편식은 대개 시간이 지나면서 누그러집니다. ARFID는 그렇지 않습니다. 둘 사이의 정확한 경계는 애초에 논쟁 중입니다. 어떤 연구자들은 이를 연속선으로 보고, 다른 연구자들은 서로 구별되는 두 가지 그림으로 봅니다.
건강과 지원
매우 좁은 식생활도 영양적으로 충분할 수 있고, 반대로 오래 남는 구멍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가장 제한이 심한 사례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드물어진 병증까지 포함해 심각한 결핍이 보고되었습니다. 이는 눈으로 짐작할 수 없습니다. 의사와, 가능하다면 영양사와 함께 검사를 받아야만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중대한 제한은 모두 의학적 진료를 받을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질식 공포와 관련된 것은 무엇도 집에서 어림짐작으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치료 쪽에서는 ARFID에 맞춘 인지행동적 작업이 있고, 아동에게는 가족을 참여시키는 접근이, 경우에 따라서는 작업치료사나 언어재활사와 함께하는 감각적 지원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른 섭식장애에 비해 더 최근의 것이고 근거가 덜 탄탄하게 쌓여 있습니다. 현실적인 목표가 무엇이든 먹게 되는 것인 경우는 드뭅니다. 안전한 기반을 넓히고, 섭취를 확보하고, 함께 하는 식사를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 그리고 연애
식사는 만남의 기본 사회적 의례이고, 그래서 ARFID는 그 길 한가운데에 놓입니다. 어려운 것은 거의 언제나 접시 자체가 아닙니다. 거기 따라붙는 시선이고, 소리 내어 던져지는 질문이며, 종업원의 재미있어하는 한마디이고, 늘 해명해야 한다는 느낌입니다.
상대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장소를 고르기 전에 메뉴를 확인해 안전한 음식이 있는지 알아 두는 것. 맞은편 접시에 대해 사람들 앞에서도, 둘만 있을 때도 말하지 않는 것. 나가기 전에 먹고 나오는 것, 늘 같은 식당으로 돌아가는 것, 전채를 세 개 시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예고 없이 맛보게 하는 그 다정한 작은 시험을 그만두는 것. 그 행동은 배려가 아니라 배신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게다가 진단명은 관계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요리를 하는지, 손님 초대를 좋아하는지, 먹을 수 있는 목록이 넓어질지 말해 주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꺼낼 때는 처음 함께 식사하기 전의 한 문장이면 대개 충분합니다. 나는 좁은 범위의 음식을 먹고, 이것은 체중과 무관하며, 뭔가를 맛보게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고요. 미리 말해 두면 이 주제는 저녁 식사 중간의 난처한 순간이 아니라 실용적인 정보가 됩니다.